나, 태어나도 되는 거였을까.
나지막이 흐르는 말에 담겨있던 것은 의문이 아닌 체념이었다.
그리고 그 해, 너의 나이는 겨우, 10살이었다.
거만한 듯 예의 발랐던 모습과 가벼운 듯 진중한 목소리로 동생을 부탁하던 모습에 동생 못지않게 밝고 천진난만한 유년시절을 보냈을 거라 제멋대로 상상했었다. 그래서일까, 그 시절 진짜 너의 모습은 한동안 뇌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잔뜩 경계하던 눈빛은 낯선 이를 향한 것이 아닌 이 세상 모든 이들을 향한 적대감이었고, 온몸으로 거부하던 것은 타인만이 아닌 '자기 자신의 존재마저'였다.
그렇게 너는 10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모든 마음의 문을 걸어 잠그고서, 밝게 내리쬐는 태양의 빛줄기를 가리고 비집고 새어나오는 눈물샘을 틀어막았으며 타인의 온기를 소망하는 말문을 닫았다.
그래. 그때 너는 이미, 달관하고 있었다. 제 존재를 부정하던 이들에게 분노하면서도 어느새 그 어리석은 말에 사로잡혀 너조차 동조하고 있었다.
나, 태어나도 되는 거였을까.
역시 나 같은 건,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어.
분명 너의 말은 하나였건만 이어진 침묵 속에 뒷말이 섞여 들리는 것 같았다.
"어째서,"
어째서 그런 말을 하냐며 다그치고 싶었지만 네가 받은 상처들이 입을 막았고 그렇지 않다며 다독여주고 싶었지만 네 주위에 둘러쳐진 벽이 손발을 묶었다. 한걸음만 더 다가가면 꽈악 껴안을 수 있는데, 저 벽만 넘으면 얼어붙은 마음을 다독여줄 수 있는데, 몸도 마음도 굳은 채 움직이지 못하는 스스로가 한탄스러웠다. 차가운 겨울바람이 스며드는 것 마냥 가슴이 시렸다. 울컥하며 목구멍 끝까지 울음이 차올랐다. 저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져 눈을 부릅뜨고 이를 악물고 주먹을 움켜쥐었다. 이토록 사랑하는데 그 한마디를 전하는 것이 어려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누군가가 나를 대신해 저 아이를 어루만져 줘.
애끓는 이 마음을 전해 줘.
부디,
자신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깨닫게 해 줘.
하지만 상상은 언제나 그 안에서 끝을 맺고 기대는 무참히 깨진다. 간절히 빌었던 염원은 무심하게 건네진 한마디에 모래알처럼 바스라졌다.
"글쎄….살다보면 알게 되겠지."
왜, 확실하게 말을 해주지 않는 것일까. 그 의문은 솟구쳐 오르는 분노에 뒤덮여졌고 눈물을 참으려 꽉 쥐었던 주먹에는 다른 의미의 힘이 들어갔다.
단 한마디면, '너의 가치는 어느 누구도 함부로 정할 수 없을 만큼 소중하다'는 한마디면, 얼어버린 마음을 녹여줄 수 있을 텐데. 그 한마디를 생각하는 것이 그렇게 힘든 것일까. 곁에서 지켜보지 않았기에 가슴에 뚫린 구멍이 얼마나 큰지 모르는 것일까.
답답했다. 너에게 이 마음을 전하지 못하는 나와 너의 상처를 보듬어주지 못하는 그의 상황이.
그래. 그 시절의 난, 그저 분노하고 슬퍼하며 너를 그리워하기만 했다.
그리고,
네가 떠나고 5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난 그 말의 뜻을 이해했다.
그것은 너를 모르는 것이 아닌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에 말 할 수 있던 단 하나의 답이었다.
스스로를 부정하고 제 아비를 비롯한 온 세상에 분노하고 있던 너였기에 그렇지 않다는 단순한 말은 전혀 위안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아직은 알 수 없다는 뜻을 내비치며 미래를 꿈 꿀 수 있는 여지를 남겨주었다는 것을 어리석게도 나는 이제서야 깨닫게 되었다.
그렇게 너는 미래를 걸었고 마침내 그 미래에서 답을 찾았다.
어떤 상황이었든, 지금의 나는 그것이 얼마나 기쁜 일인지 알고 있다. 아들을 위해, 동료를 위해, 형을 위해. 저마다의 사랑으로 소중한 이를 구출하려는 그들을 바라보며 너는 오열했고 처음으로 살고 싶다고 말했다. 비록 너는 자유롭지 못했지만 소중한 사실을 깨닫고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오랫동안 질질 끌고 왔던 쇠사슬을 끊어낸 네가, 나는 아름다웠다.
잊을 수 없는 태양의 빛이 꺼져가던 순간, 한평생을 찾아 헤맸던 제 존재의 이유를 이제서야 깨달은 것이 서러워 눈물을 흘리다가도 미처 몰랐던 수많은 이들의 사랑을 이제라도 깨달은 것이 기뻐 미소를 지으며 잠든 너의 마지막 모습은 여전히 내 가슴을 울리고 눈시울을 뜨겁게 만든다.
어느 하나 깨닫지 못한 채 너를 잃었던 그 시절의 나는 어리석어 허튼 공간, 허튼 사람에게 분노하며 슬퍼하기만 했지만 새로운 사실을 깨닫고 너를 그리워하는 지금의 나는 너의 존재를 다시금 되새겨본다.
아직 많은 이들의 깊은 뜻을 모두 이해한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네가 깨달은 너의 가치만큼, 나는 너를 이해하고 있다. 그리고 앞으로도 몇 번이고 너를 떠올리며 더욱 너를 이해할 것이다.
마지막 변하지 않는 사실이 있다면,
그 시절의 나도, 지금의 나도,
네가 얼마나 빛나는 존재였는지 안다.
그리고
어떤 모습이었든,
나는 너를 사랑한다.
앞으로도 계속.
- 밝게 빛나던 포트거스.D.에이스를 기억하며